동탁의 배에 심지를 꼽다 ①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 자연연소현장. 시신은 거의 불탔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물건들은 전혀 불타지 않았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1851년 파리의 한 페인트 가게 주인이 불이 붙은 양초를 먹을 수 있다며 내기를 걸었다. 그가 양초를 입에 넣는 순간 희미하게 소리가 새어나왔고, 입술에 푸른 불꽃이 번졌다. 그러고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머리를 포함하여 가슴부터 그 위가 모두 재로 변했다. 불은 피부와 근육, 뼈가 모두 탈 때까지 꺼지지 않았으며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잿더미뿐이었다.

이것은 자연연소(Spontaneous Human Combustion)가 목격된 최초의 사례였다. 그 후 자연연소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보여 주는 몇 가지 예들이 제시됐다.

1938년 여름, 미국 노퍽의 호수와 늪지대 근처에서 보트놀이를 하던 중 갑자기 불길에 휩싸인 카펜더 부인의 예도 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이 보는 앞에서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함께 있던 남편과 자식, 그리고 보트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한편 ‘우리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 사건 심리 실무지침서’라고 설명되는 정약용의 역작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상형추의」에서 매우 ‘드물고 이상한 형사 사건’ 2건을 소개했다.

이 중 첫 번째 사건에 관해 ‘간음하려고 서로 껴안았다가 음욕의 불이 몸에서 일어났다.’고 적었는데 그는 이들을 검안한 후 자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부언했다.

그런데 정약용이 이상한 사건이라고 한 내용은 아직도 그 원리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자연연소‘와 비슷한 것은 물론 『삼국지』에 나오는 동탁(董卓, ?~192)의 죽음과도 유사하다.

동탁의 죽음

『삼국지』 초반에 등장하는 동탁(董卓)은 농서 출신이다. 동탁의 이력서는 다음과 같다.

‘자는 중영(仲潁)으로 용맹하고 꾀가 있어 오랑캐로 불리는 강인(羌人)과 호족(胡族) 수령들과 사귀었고 167년 군에서의 공적으로 낭중에 올랐고 후에 병주자사, 하동태수를 역임했다. 184년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십상시(十常侍) 즉 환관들의 난을 평정한 후 실권을 잡자 한나라 소제(少帝) 유변(劉辨)을 폐하고 헌제(獻帝) 유협(劉協, 진류왕)를 옹립한 후 낙양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한다.’

동탁이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황제로 등극시킬 때 형주자사이자 낙양의 헌병대사령관이라 볼 수 있는 정원(丁原)이 극구 반대했다. 그런데 정원에게는 천하무적인 여포(呂布, ?~199)가있어 함부로 그를 제거할 수도 없었다.

▲ 동탁, 여포, 초선. 왕윤이 초선을 미끼로 이간계를 펼치자 여포는 양아버지 동탁을 살해한다.

이때 동탁의 기지가 발휘된다. 정치적인 술수를 발휘하여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천리마를 아낌없이 여포에게 주자 여포는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에게 귀의한다. 동탁이 여포를 양아들로 삼자 천하에 동탁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왕윤이 동탁에게 초선(貂蟬)을 첩으로 준 후 여포와 이간질시켜 결국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도록 한다.

이 대목에서 나관중이 동탁을 『삼국지』에서는 가장 질이 좋지 않은 악당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양아들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다면 패륜아 중 패륜아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포는 그다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나관중이 동탁을 어찌나 나쁘게 보았던지는 『삼국지』에 적혀 있는 동탁의 등장 장면을 보며 상상하자.

‘그는 서량(西涼, 섬서성 서부) 땅에 있는데 황건적 난 때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다. 이에 죄를 물으려 할 때 약삭빠르게 환관들인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쳐 겨우 무사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그들과 늘 내통해 지내면서 세운 공도 없이 여러 차례 영전을 거듭하다가 벼슬이 서량자사(西涼刺史)에 이르렀다. 또한 대군 20만 명을 통솔했다.’

당대에 서량은 중국 중원과는 다른 소위 유목민, 즉 기마무사의 본거지이며 진시황제도 이곳을 근거지로 중국을 통일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군기가 잘 잡히지 않는 유목민으로 구성된 20만 명의 부대를 거느린다는 것은 그 능력이 대단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황건적은 누런 두건을 머리에 쓰고 태평교단의 영도 아래 ‘창천(蒼天)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黃天)이 마땅히 서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한다. 후한 말 정치가 부패하자 이들이 난을 일으키고 토벌하는 와중이 삼국이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여하튼 동탁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진수의 『삼국지』 <동탁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 낙양에 들어갔을 때 휘하의 군대는 고작 3,000명뿐이었다. 이 병력으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으므로 동탁은 3천 명의 군사들을 매일 밤 평복으로 성을 나가게 했다가 이튿날 다시 대대적으로 행진하면서 들어오게 했다. 군사들의 행진이 4~5일 동안 계속되자 사람들은 그가 천군만마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한데 나관중은 고의적으로 그를 폄훼했다. 이는 나관중이 항상 북방의 기마민족을 중원의 중국인과는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사실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인데 나관중은 중국인들이 북방의 야만적인 기마민족과는 같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당시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실력자 동탁이 중원의 중국인에게 패배했음을 나관중은 매우 만족해하면서 동탁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문명민족인 중국이 오랑캐인 북방기마민족에게 점령될리 없다는 것이 나관중의 시각이다.

▲ 중국의 자랑 난주 철교.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에 한 명으로 감숙성 난주 인근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지만 실존 인물이 아니다.
『삼국지』 초반에 큰 역할을 하는인물로 동탁, 여포, 왕윤, 초선을 들 수있다. 왕윤은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중국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양귀비)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초선을 이용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왕윤은 자신의 가기(家妓)인 초선을 동탁의 첩으로 준 후 여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초선이 여포에 마음이 있으나 동탁이 힘으로 그녀를 빼앗아 갔다고 고자질 한 것이다. 결론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여포가 자신의 양아버지인 동탁을 살해한다.『삼국지』에서 여포와 동탁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하는 연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초선은 동탁과 여포가 제거되자 조조에 의해 사로잡혀 허도로 간다.

초선은 현 감숙성의 성도인 란주(蘭州)와 무위(武威)시 인근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막상 이들 지역을 방문해 초선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해도 그녀의 출생지 등에 대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초선은 다른 3명의 중국 미인과는 달리 나관중이 만들어 낸 가공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선이 중국 4대 미인 중에 한 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나관중의『삼국지』가 가진위용이 그만큼 높다는 반증이다. 초선이 가공인물인데도 실존했던 인물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한그 필력이역사조차 바꿀 수 있음을 십분 증명한 것이다. 나관중 만세라 아니할 수 없다.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

동탁의 죽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 대목이다.

‘생전에 남달리 몸이 비대하던 동탁은 죽은 송장도 유난히 크고 기름져 군사들이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서 등(燈)을 만들었다. 붙인 불은 이글이글 기름이 끓으며 며칠 밤을 두고 탔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동탁의 시체를 발로 짓밟고 머리를 걷어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동탁의 죽음이 아니라, 과연 위의 설명처럼 사람의 배에 심지를 꽂아 불을 켜서 등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느냐이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돼지기름에 심지를 박아 등불로 사용했다. 나관중은 동탁이 매우 비대하여 그 기름기 때문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 등을 만들었다고 쓴 것 같다. 사람의 비계와 기름기가 돼지기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인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결론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건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로 이를 ‘심지 효과’라고 하는데 자연연소와 직결된다.

정약용의 『흠흠신서』를 가리켜 일부 학자들은 ‘우리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 사건 심리 실무지침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약용 사후에 대량 인쇄되어 목민관들의 지침서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목민심서』, 『경세유표』와 함께 정약용의 3대 역작인 『흠흠신서』는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 다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집필했다.

▲ 정약용의 『흠흠신서』는 우리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 사건 심리 실무지침서로 알려진다.
『흠흠신서』에는 조선 후기에 벌어진 각종 사건, 특히 영조와 정조 시대의 판례를 모아 당대의 복잡한 사건들의 해결 단서를 찾는데 필요한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있다. 특히 골머리 아픈 각종 민형사 사건에 대한 판례와 자신의 의견 등을 피력했으므로 당대의 조선 관리들에게는 필독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흠흠신서』는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률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경사요의」에는 당시 범죄인에게 적용하던 『대명률』과 『경국대전』의 형벌규정 기본원리, 지도이념이 되는 고전적 유교경전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요약, 논술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사서 중에서 참고할 만한 선례를 뽑아서 요약하였다. 또 여기에는 중국 79건, 조선 36건 등 도합 115건의 판례가 분류, 소개되어 있다.

「비상전초」에는 살인 사건의 문서를 작성하는 수령과 관찰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 위하여 중국 청나라의 비슷한 사건에 대한 표본을 선별하여 해설과 함께 비평하였다. 또 독자들이 살인 사건 문서의 이상적인 형식과 문장기법ㆍ사실인정기술, 그리고 관계법례를 참고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논술하였다.

「의율차례」에는 당시 살인 사건의 유형과 그에 따르는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제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상형추의」에는 정조가 심리하였던 살인 사건 중 142건을 골라 살인의 원인ㆍ동기 등에 따라 22종으로 분류했다. 각 판례마다 사건의 내용, 수령의 검안(檢案), 관찰사의 제사(題辭), 형조의 회계(回啓), 국왕의 판부(判付)를 요약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정약용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덧붙였다.

또 「전발무사」에는 정약용이 곡산부사ㆍ형조참의로 재직 중 다루었던 사건과 직ㆍ간접으로 관여하였던 사건, 유배지에서 문견(聞見)한 16건에 대한 소개와 비평ㆍ해석 및 매장한 시체의 굴검법(掘檢法)을 다루고 있다.

당시의 제도는 목민관이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을 온통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백성이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 정약용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박석무 교수는 요즘의 법률적 논리로 본다면 『흠흠신서』의 내용은 형법과 형사소송법 상의 살인 사건에 대한 형사소추에 관한 절차나 전개 과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법률적 접근만 다룬 것이 아니라, 법의학적ㆍ형사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으며 사건의 조사와 시체 검험 등 과학적인 접근까지 상세하게 다루었다.

생명에 관한 범죄는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공정히 처리해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꼼꼼하고 치밀한 조사ㆍ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계속)

참고문헌 :
『삼국지 강의』, 이중텐, 김영사, 2007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8.09.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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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추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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